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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커미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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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구 커미셔너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이다.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1920년부터 1944년까지 재임하며 블랙삭스 스캔들 해결과 선수 영구 제명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해피 챈들러, 포드 프릭, 윌리엄 에커트, 보위 쿤, 피터 유베로스, 바트 지어마티, 페이 빈센트, 버드 셀리그를 거쳐 2015년부터 롭 만프레드가 현재까지 커미셔너직을 수행하고 있다. 역대 커미셔너들은 선수 연금 기금 설립, 흑인 선수들의 MLB 데뷔 지원, 경기력 향상 약물 문제 해결, 수익 증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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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커미셔너
기본 정보
직책 종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영어 명칭Commissioner of Baseball
현직
커미셔너롭 만프레드
취임일2015년 1월 25일
상세 정보
창설1920년
이전 명칭내셔널 리그 회장 (1903년 ~ 1920년)
전미 프로 야구 회장 (1920년 ~ 1945년)
담당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2. 역대 커미셔너

이름재임 기간주요 경력명예의 전당 헌액
1대케네소 M. 랜디스1920년 11월 12일 - 1944년 11월 25일일리노이주 북부 연방 지방 법원 판사1944년
2대해피 챈들러1945년 4월 24일 - 1951년 7월 15일변호사, 켄터키 주지사, 연방 상원 의원1982년
3대포드 프릭1951년 9월 20일 - 1965년 11월 17일스포츠 작가, 내셔널 리그 회장1970년
4대윌리엄 에커트1965년 11월 17일 - 1968년 11월 20일미국 공군중장
5대보위 쿤1969년 2월 4일 - 1984년 9월 30일변호사2008년
6대피터 유버로스1984년 10월 1일 - 1989년 3월 31일여행사 사장,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조직 위원장
7대버트 지아마티1989년 4월 1일 - 1989년 9월 1일예일 대학교 총장, 내셔널 리그 회장
8대페이 빈센트1989년 9월 13일 - 1992년 9월 13일변호사, 콜롬비아 픽처스 사장, 코카콜라사 부사장
9대버드 셀리그1998년 7월 9일[4] - 2015년 1월 24일자동차 판매 회사 사장, 밀워키 브루어스 구단주2017년
10대롭 맨프레드2015년 1월 25일 - 현재변호사, MLB 최고 운영 책임자


2. 1. 케니소 마운틴 랜디스 (1920-1944)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블랙삭스 스캔들이 드러나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은 이미지 하락에 따른 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개혁 위원회 위원장으로 야구와 이해 관계가 없는 비야구 관계자이면서 열렬한 야구 팬으로도 알려진 연방 지방 법원 판사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Kenesaw Mountain Landis)를 영입했다. 랜디스는 "야구계 전체에 미치는 거의 무제한의 절대적인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커미셔너 직을 수락했으며, 구단주들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이전의 3인 공동 통치 체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단독 커미셔너 체제로 전환되었다.

블랙삭스 스캔들에 연루된 화이트삭스 선수 8명은 1921년 8월 2일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랜디스는 이들을 포함한 관련자 15명 전원을 영구 제명 처분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판결과 관계없이 경기를 포기하거나 계획하는 선수는 누구든 프로 야구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MLB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블랙삭스 스캔들 관계자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영구 제명되었다. 여기에는 팀 동료에게 승부 조작을 제안한 할 체이스, 헤이니 지머만, 도박과 연루된 진 폴레트, 다른 팀 선수에게 승부 조작을 제안한 지미 오코넬과 이를 사주한 코치 코지 드란, 야구 경기를 도박에 이용한 구단주 윌리엄 콕스, 경기를 포기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다른 팀 선수에게 보낸 필 더글러스, 도난 차량 판매 혐의를 받은 베니 카우프 등이 포함된다.

랜디스는 때때로 신중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여, 랜디스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부정 행위 추궁에 적극적이었던 아메리칸 리그 회장 반 존슨과는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1926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타이 콥,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트리스 스피커 두 감독이 승부 조작 경기를 약속하고 실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랜디스는 두 사람의 결백을 주장하며 구단주들의 지지를 받아 콥과 스피커를 고발한 존슨 회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랜디스는 니그로 리그의 흑인 선수들에게 메이저 리그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1944년 사망할 때까지 커미셔너로 재임했으며,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야구 폭군"으로 두려움을 받았다. 그의 공적을 기려 MVP의 공식 명칭은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상"으로 불리고 있다.

2. 2. 해피 챈들러 (1945-1951)

케니소 마운틴 랜디스의 사망 이후, 미국 육군성은 당시 미국 상원 의원이었던 해피 챈들러를 후임 커미셔너로 추천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945년 구단주 회의에서 챈들러는 만장일치로 새로운 커미셔너로 선출되었다.

챈들러는 선수 연금 기금 설립에 힘써 "선수의 커미셔너"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선수들의 복지 향상에 기여한 중요한 업적이다.

1947년에는 MLB 역사상 중요한 결정에 관여했다.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MLB 데뷔를 두고 로빈슨의 소속 구단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제외한 15개 구단 구단주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챈들러는 포드 프릭 내셔널 리그 회장과 함께 다저스의 입장을 지지하며 로빈슨의 데뷔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MLB의 인종 통합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시즌 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감독 레오 도로셔가 당시 아직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할리우드 여배우 라레인 데이와 결혼하자, 이를 "야구에 유해한 행위"로 판단하여 도로셔에게 1년간 출장 정지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2. 3. 포드 프릭 (1951-1965)

내셔널 리그 회장을 역임한 포드 프릭(Ford Frick)이 해피 챈들러의 후임 야구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1961년에는 연간 경기 수가 154경기에서 162경기로 증가했는데, 이 해 몇몇 선수들이 1927년에 베이브 루스가 세운 60홈런 기록을 넘어서는 속도로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에 프릭은 시즌 도중 기자 회견을 열어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은 시즌 길이에 따라 구분하여 기록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로저 매리스는 시즌 158번째 경기에서 60호 홈런을, 마지막 162번째 경기에서 61호 홈런을 기록했다. 프릭의 지시에 따라 매리스의 기록 옆에는 공식적으로 별표(asterisk)가 붙게 되었다.

2. 4. 윌리엄 에커트 (1965-1968)

포드 프릭의 후임 커미셔너로는 156명의 후보가 거론되었다. 커티스 르메이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전 미국 공군 중장 출신 윌리엄 에커트가 1965년 11월 17일 만장일치로 선출되어[5] 제4대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하지만 에커트는 취임 당시 10년 이상 야구 경기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야구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서는 "무명 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에도 야구 경기를 중단하는 것을 거부하여 미국 국민들의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선수 노조와의 관계 등 노사 문제 처리에서도 신뢰를 얻지 못했고, 결국 1968년에 3년 이상의 임기를 남겨둔 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5. 보위 쿤 (1969-1984)

보위 쿤은 자유 계약 선수(FA) 제도 도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선수 협회 회장인 마빈 밀러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969년 오프 시즌, 커트 플러드는 FA 자격 인정을 요청했으나 쿤은 이를 거부했다. 플러드는 선수의 자유로운 이적을 제한하는 보유 조항이 독점 금지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 플러드 대 쿤 재판은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선수 협회와 구단 간의 갈등은 심화되어 1981년에는 50일간의 파업이 발생하기도 했다.

쿤은 리그 기강 확립을 위해 선수 징계에도 나섰다. 1970년에는 도박 연루 및 권총 불법 소지 혐의가 드러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 데니 맥클레인에게 영구 제명 처분을 내렸다가 이후 개막 후 3개월 출장 정지로 변경했다. 또한, 1983년에는 카지노에서 고객 담당으로 일한 윌리 메이즈와 미키 맨틀에게 각각 영구 제명 처분을 내렸다.

한편, 쿤은 구단주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찰리 O. 피니와는 여러 차례 충돌했다. 1973년 1973년 월드 시리즈에서 실책을 연발한 마이크 앤드루스를 피니 구단주가 강제로 부상자 명단 (DL)에 올리려 하자, 쿤은 이를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1976년에는 피니 구단주가 보스턴 레드삭스뉴욕 양키스에 여러 선수를 350만달러에 매각하려 했을 때, 이것이 리그 전체의 균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계약을 무효화했다.

2. 6. 피터 유버로스 (1984-1989)

보위 큐언이 노사 양측의 반발로 계약 갱신에 실패하자, 피터 유버로스가 1984년 10월 1일 제6대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유버로스는 취임 이듬해인 1985년에 전임 커미셔너 시절 영구 추방되었던 윌리 메이스미키 맨틀을 복권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또한, 1986년 2월에는 피츠버그 약물 재판과 관련하여 코카인 소지 또는 판매에 연루된 선수 11명에게 조건부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는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가장 엄격한 처분으로 평가받았다.

유버로스는 재임 기간 동안 TV 방송권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MLB의 재정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적으로 1990년부터 4년간 CBS와 총액 10.6억달러에 달하는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여 리그 수입을 증대시키고 경영 흑자 전환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버로스는 겉으로 내세운 노사 협조와 달리 구단주 및 제너럴 매니저들과 함께 FA가 된 선수들과 계약하지 않도록 공동 모의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조정위원회의 조사 결과 공동 모의 사실이 인정되었고, 이 여파로 유버로스는 1989년 시즌 개막 전에 커미셔너 직에서 사임했다. 공동 모의 문제는 유버로스 사임 후인 1990년 12월, 구단 측이 피해를 입은 선수들에게 총액 2.8억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노사 간 화해가 성립되면서 마무리되었다.

2. 7. 바트 지어마티 (1989)

피터 유버로스의 후임으로 내셔널 리그 회장이었던 A. 바틀릿 지어마티(A. Bartlett Giamatti)가 취임했다. 그는 전년에 26개 구단 구단주로부터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다. 지어마티는 1989년 4월 1일부터 커미셔너 직무를 수행했다.

재임 중 가장 중요한 결정은 1989년 8월 24일, 야구 도박에 연루된 혐의로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 피트 로즈를 영구 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을 내린 지 불과 8일 뒤인 1989년 9월 1일, 지어마티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51세였으며, 재임 기간은 154일에 불과했다.

2. 8. 페이 빈센트 (1989-1992)

1989년 9월 1일, A. 바틀릿 지어마티 커미셔너가 갑작스럽게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오랜 친구였던 페이 빈센트가 제8대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1990년, 양키스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마피아와 접촉하여 선수 데이브 윈필드의 사생활을 조사하도록 의뢰한 사실이 드러났다. 빈센트는 이에 대해 스타인브레너에게 2년간 구단주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같은 해 노사 교섭 과정에서 구단주 측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록아웃을 단행하며 선수들을 압박했다. 빈센트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 양측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그는 선수들의 최소 연봉을 기존 6.8만달러에서 10만달러로 인상하고, 수익 분배 문제를 다룰 6명의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는 새로운 기본 계약안을 제시하여 32일 만에 록아웃 사태를 종결시켰다.

그러나 선수 측에 유리한 정책을 펼친다는 이유로 빈센트는 구단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구단주 회의는 18대 9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빈센트의 사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빈센트는 1992년 9월 13일 커미셔너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빈센트를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다음 5명의 인물들은 언론에 의해 "'''The Great Lakes Gang'''"으로 불렸다.

2. 9. 버드 실리그 (1998-2015)

브루어스 구단주였던 버드 실리그는 커미셔너 대행을 거쳐 1998년 7월 9일 제9대 커미셔너로 정식 취임했다. 구단 운영 경험자가 구단 전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커미셔너 직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1994-95년의 장기 파업 당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2002년 파업 위기 시에는 선수회와의 협상에 앞서 경영난 해소를 이유로 2개 구단 해체를 시도하여 선수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1989년 49만달러에서 1994년 114.99999999999999만달러로 급증하는 상황에서[6], MLB는 관중 동원과 중계권료 수입 증대를 위해 1994년부터 양대 리그를 3개 지구로 재편하고 와일드 카드 제도를 포함한 디비전 시리즈를 도입했다. 실리그 재임 중인 2012년에는 와일드카드 팀을 2팀으로 늘려 1경기 와일드카드 게임을 신설, 포스트 시즌 진출 팀을 리그당 5개로 확대했다.

실리그 재임 기간 동안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경기력 향상 약물 사용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초기에는 약물 문제 대처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이후 여론의 요구에 따라 조지 J. 미첼에게 실태 조사를 의뢰했고, 2007년 12월 13일 미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 외에도 실리그는 야구 인기 부흥과 경기 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 1996년 양대 리그 교류전인 인터리그 도입 (2013년 연중 개최로 변경)
  • 1999년 마이너 리그 유망주들이 출전하는 퓨처스 게임 창설
  • 2000년 일본에서의 첫 북아메리카 외 지역 공식 경기 개최
  • 2001년 심판 판정 분석 시스템인 퀘스테크 시스템 도입
  • 2003년 MLB 올스타전 승리 리그에 월드 시리즈 홈 어드밴티지 부여
  • 2004년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기리는 재키 로빈슨 데이 제정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창설 및 개최
  • 2008년 홈런 판정에 한정된 비디오 판독 제도 도입 (2014년 대상 플레이 확대)


소규모 구단이었던 브루어스 구단주 경험을 바탕으로, 연봉 총액 상한을 넘는 구단에 부과하는 '''사치세''' 제도와 구단 간 수익을 배분하는 '''수익 분배 제도''' 도입을 추진하여 구단 간 재정 격차 완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7], 실리그가 커미셔너 대행으로 취임했던 1992년 16.599999999999998억달러였던 MLB 총수익은 2012년 75억달러를 넘어서며 큰 폭으로 증가했다[8][9].

실리그는 2015년 1월 24일 퇴임했으며, 이후 명예 커미셔너로 추대되었다[10].

2. 10. 롭 맨프레드 (2015-현재)

2015년 1월 25일에 제10대 MLB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변호사 출신으로, 1980년대부터 노사 협상 등에서 MLB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94년 파업이 발생했을 때는 구단주 측의 상담역을 맡았으며, 1998년 버드 실리그가 커미셔너로 취임하면서 MLB 사무국에 합류했다. 이후 실리그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노사 협상과 약물 문제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여러 차례의 노사 협상에서 파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능력을 인정받아 실리그의 후임 커미셔너로 선출되었다[11]

참조

[1] 법률 메이저리그 헌장 제2편 제9조
[2] 뉴스 MLB=차기 커미셔너에 맨프레드씨, 노사협상에서 실적 https://jp.reuters.c[...] 로이터 2014-08-15
[3] 뉴스 23년 만의 톱 교체=맨프레드씨, 노선 계승-미 대리그 기구 http://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2015-01-27
[4] 문서 정식 취임 전인 1992년부터 1998년까지는 커미셔너 대리.
[5] 웹사이트 William Eckert http://sabr.org/biop[...]
[6] 뉴스 MLB 선수회가 사상 최장이 되는 파업에 돌입 http://sportiva.shue[...] sportiva
[7] 뉴스 적자에 고민하는 일본 구단과 무엇이 다른가? 사상 최고 수익에 들끓는 MLB의 경영술 http://number.bunshu[...] Number
[8] 뉴스 Commissioner agrees to three-year extension http://sports.espn.g[...] ESPN
[9] 뉴스 왜 메이저리거는 「약」이 그만둘 수 없는가? https://www.itmedia.[...] Business Media 誠
[10] 뉴스 대리그 세리그 커미셔너가 퇴임 「긴 여행이었다」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 2015-01-25
[11] 뉴스 차기 커미셔너 맨프레드씨의 기량은 어떠한가 https://www.nikkansp[...] 일간스포츠 2014-08-21
[12] 웹인용 MLB Executives http://mlb.mlb.com/m[...] Major League Baseball 200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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